본문 바로가기

책 후기

작은 파티 드레스 (크리스티앙 보뱅, 1991) 최근에는 글을 쓰기가 어려웠다. 현생에 치였다는 이유로 설명하곤 했지만 사실 현실을 대하는 자세가 피로해진 탓이었던 것 같다. 삶을 구성하는 순간들과 활동들에 대한 의미를 찾는게 나에게는 중요한데, 그게 많이 흐려져서 요즘은 힘들었다. 불어권 문학을 좋아하긴 하지만, 크리스티앙 보뱅이라는 에세이스트를 처음 알게 된 건 작년에 "그리움의 정원에서" 라는 산문을 통해서였다. 그때 맑고 아름다운 문체를 너무 오랜만에 만난 터라 거의 반해버렸었다. 그리고 올해 좋아하는 언니랑 들른 서점에서 이 작가가 쓴 독서에 관한 산문집을 발견하고 바로 집어 왔는데, 그게 "작은 파티 드레스"였다. 하루키의 소설은 드라이한 편인데 반해 보뱅의 문체는 마치 지베르니에서 산책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문장 하나하나와 묘사가.. 더보기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목정원, 2021) 리뷰 어떤 책은 그 책의 언어를 빌려오지 않고서는 절대로 그 아름다움을 전할 수 없으리라는 예감이 든다. 내겐 이 책이 그렇다. 미학과 공연예술학의 관점으로 삶과 우주를 밀도있고 용기있게 바라본 글이며, 작가가 인용한 많은 극작품에 대한 해석도 무척 흥미로웠으나 나는 무엇보다 글쓴이의 관점을 사랑하게 되었다. 소멸이라는 삶의 필연적인 속성을 바탕으로 남겨질 노래와 몸짓, 보이고 흘러가는 것들의 의미를 아득하게 파악하는 이 시선을. 언어와 인식의 관계를 고찰할 때 소쉬르의 이론에 따르면 모든 기호는 ‘기표’(signifiant, 겉으로 드러나는 기호의 형식) 와 ‘기의’(signifié, 기호가 의미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같은 기의에 대해서도 기표는 달라질 수 있으며 (나라마다 언어가 다른 것을 이 이.. 더보기
Why Fish Don't Exist (Lulu miller, 2021) 리뷰 편의상 나의 취미는 독서라고 말하기는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양질의 텍스트를 읽고 생각하고 발견하는 행위를 좋아한다. 내 기준으로 양질의 텍스트란 다음 조건을 만족하는 글이다. (장르는 소설, 시, 에세이, 논문, 탐사보도 뭐든 상관 없다.) 1. 지적으로 혹은 삶의 어떠한 영역에 호기심과 파동을 일으킬 것. (개인적인 경험을 서술함으로서 인생의 한 측면을 들여다 볼 수도 있고, 어떠한 이론에 대한 깊이있는 탐구로 지적인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다.) 2. 주요 명제, 혹은 그를 설명하는 시각이 편향되거나 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담고 있지 않을 것. 보통은 플롯을 아예 창작하는 문학이 아니라면 주제가 정해져 있는 책- 특히나 에세이나 논픽션에서 새로운 방식의 서술은 정말 어렵다. 그러나 이 책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