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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후기

작은 파티 드레스 (크리스티앙 보뱅, 1991)

최근에는 글을 쓰기가 어려웠다. 현생에 치였다는 이유로 설명하곤 했지만 사실 현실을 대하는 자세가 피로해진 탓이었던 것 같다.

삶을 구성하는 순간들과 활동들에 대한 의미를 찾는게 나에게는 중요한데, 그게 많이 흐려져서 요즘은 힘들었다.

 

불어권 문학을 좋아하긴 하지만, 크리스티앙 보뱅이라는 에세이스트를 처음 알게 된 건 작년에 "그리움의 정원에서" 라는 산문을 통해서였다. 그때 맑고 아름다운 문체를 너무 오랜만에 만난 터라 거의 반해버렸었다. 그리고 올해 좋아하는 언니랑 들른 서점에서 이 작가가 쓴 독서에 관한 산문집을 발견하고 바로 집어 왔는데, 그게 "작은 파티 드레스"였다.

 

하루키의 소설은 드라이한 편인데 반해 보뱅의 문체는 마치 지베르니에서 산책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문장 하나하나와 묘사가 아름다워서, 언어의 정원에서 산책하고 있다는 기분이 드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책의 두께 자체는 굉장히 얇지만 페이지 하나하나를 음미하며 조용한 장소에서 읽는 것을 추천한다. 생각보다 감각에 굉장히 집중하면서 읽어야 진가가 발휘된다.

 

내가 책을, 글을 왜 좋아했던가? 라는 고민에 대해서 그동안 명료하게 답을 할 수가 없어서 '예전부터 읽다 보니 습관이 됐어' 내지는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 들어' 라는 말로 설명하고 넘긴 적이 많았는데 이젠 누군가 그 질문을 하면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글과 말을 사랑하는 에세이스트가 독서에 관해 쓴 산문을 지금 만난 건 그런 의미에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긴 글은 쓰지 않고, 마음에 가 닿았던 부분들을 소개해 보겠다. (길이상 발췌를 일부분만 하긴 했지만, 맥락이 연결되어 있는 문장들이 많아서 되도록 통독하는 것을 추천한다.)

당신은 금요일 저녁에 책을 읽기 시작해 일요일 밤 마지막 페이지에 이른다. 이제는 책에서 나와 세상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어려운 일이다. 무용한 독서에서 유용한 거짓으로 넘어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대작을 읽은 다음이면 어김없이 왠지 모를 불안과 불편한 감정에 빠진다. 누군가가 당신의 마음을 읽을 것만 같다. 사랑하는 책이 당신의 얼굴을 투명하게- 파렴치하게 만들어 놓지는 않았는지. 그런 헐벗은 얼굴로는, 행복이 고스란히 드러난 얼굴을 하고는 길에 나설 수 없다. 잠시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낱말들이 먼지처럼 햇빛 속에 흩어지기를 기다려야 한다. 책을 읽은 뒤 기억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한두문장 기억이 날까? 누군가 아이에게 성을 보여준다고 하자. 아이는 세부사항만 볼 것이다. 두 개의 돌 사이에 돋아난 풀 한 포기 정도. 마치 그 성이 발하는 진정한 힘이 광기에 찬 한 포기 풀의 떨림에서 비롯된다는 듯이 말이다. 당신은 이런 아이와 흡사하다. 당신이 사랑하는 책들은 당신이 먹는 빵과 뒤섞인다. 그 책들은 스쳐 지나간 얼굴이나 맑고 투명한 가을 하루처럼 삶의 온갖 아름다움과 운명을 같이 한다. 그것들은 의식으로 통하는 문을 알지 못한 채 몽상의 창을 통해 당신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와 당신 자신은 결코 가지 않는 깊숙한 외딴방까지 교묘히 스며든다. 몇 시간이고 책을 읽다 보면 영혼에 살며시 물이 든다. 당신 안에 존재하는 비가시적인 것에 작은 변화가 닥친다. 당신의 목소리와 눈빛이, 걸음걸이와 행동거지가 달라진다.

작은 파티 드레스 p.66~67

그런데 때론 어떤 사람들에게, 더 적은 수의, 훨씬 적은 수의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다름 아닌 독자들이다. 가던 길을 남들이 포기하는 여덟 살 혹은 아홉 살 무렵에 이 길로 들어서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독서의 길로 뛰어드는 그들은 언제까지나 걸음을 멈추지 않으며 그 길이 끝이 없음을 알고 기뻐한다.

--중략--

언어들의 고독과 영혼의 고독을 발견했던 첫 경험의 언저리에 머문다.

작은 파티 드레스 p. 14~15

무(無)나 다름 없는 풍경 앞에서 당신은 대량생산된 인간, 부재하는 인간을 알게 된다. 파리에서 도쿄로, 도쿄에서 뉴욕으로, 전산화된 세상을 두루 누비고 다니는 이 사람은 이미 죽어 떠도는 시신 같다. 조급한 그의 태도에서 공허가 배어 난다. 그가 아무리 말을 많이 해도 그의 귀에 들리는 것은 자신의 목소리뿐이다.

--중략--

그는 모든 것을 수면 상태에서 본다.

작은 파티 드레스 p. 71~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