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아카데미 시상식이 얼마 남지 않았다. Best Picture 영역 후보 작품들을 보니 듄, Don't look up 등 작년의 화제작들이 먼저 눈에 띈다. 후보 중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들도 보이는데 드라이브 마이 카 (류스케 하마구치 감독,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원작) 와 파워 오브 도그 (제인 캠피온 감독) 가 그것이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선 "여자 없는 남자들" 에 수록된 작품으로 책을 먼저 접했다. 아직 영화는 시간을 내서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건 다음에 같이 가져와 볼 계획이고 오늘은 "The Power of the Dog"에 대한 단상을 남겨보려 한다.
개인적으로 소설을 원작의 영화들은 책 먼저, 영화 다음의 순서를 나름 고집하는 편이다. 이유는 한 매체가 제공하는 경험이 상상력을 제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러닝타임의 제한이 있고 편집이 화법의 바탕이 되므로, 소설의 모든 맥락을 포함할 수 없다. 따라서 인물의 행동을 더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영화일지라도 맥락과 배경의 설명이 훨씬 입체적인 쪽은 역시 책이다.
1. 필과 피터
작중에는 광활한 서부를 배경으로 쫓고 쫓기는 개와 토끼의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는 주요 등장인물 필과 피터의 역학을 나타내는데 중요한 암시로 작용하기 위함이다.
필은 작중 여러 묘사를 통해 언급되듯 예민하고 총명한 사람이다. 다만 그는 목장에서 일하면서 "남성성"이 지배하는 집단 내에 있었기에 자신의 예리함뿐만 아니라 동류 집단과 다른 감수성을 (주로 과거 서부 사회의 "strength", "masculinity" 에 반대된다고 생각하는 것들) 을 억압하고 비난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는 또한 자신만이, 그리고 오래 전 가슴에 묻어 둔 사람만이 알았던 상징을 파악하는지를 척도로 사람들을 남몰래 시험하고 자신의 기억과 감정을 의도적으로 고립시켰다. 피터가 테이블을 장식하기 위해 영수증으로 만든 종이꽃을 웃음거리로 만들려고 노력하고, 조소하는 것도 자신의 심연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라고 해석된다.

The Power of the Dog(2021) . 필이 피터가 만든 종이꽃을 태워서 물컵에 넣어버린다.
위와 같은 맥락에서, 아래 인용구의 '개'는 1) 필 자신이기도 하면서 2) 필이 남들에게 들키기 두려워하는 생각을 쫓고자 하는 매개체
이렇게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목장 저택 앞의 언덕에 정점이 드러난 바위에서, 언덕 자락을 여드름처럼 흉하게 뒤덮은 세이지브러시 덤불에서, 그는 질주하는 개의 놀라운 형상을 보았다. 개의 날씬한 뒷다리는 튼튼한 양어깨를 앞쪽으로 떠밀었다. 더운 김을 뿜으며 아래로 수그린 주둥이는 북쪽 산의 골짜기와 능선과 산그늘로 도망 다니는 겁에 질린 어떤 것-어떤 생각-을 쫓고 있었다. 그 추적이 어떻게 끝날지 필은 머릿속으로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개는 먹잇감을 붙잡을 운명이었다. 그는 눈을 들어 산을 보기만 해도 그 개의 숨결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거대한 개가 그토록 또렷이 보이는데도 그 형상을 알아본 이는 필 말고 딱 한 사람 뿐이었고, 조지는 결코 그 한 사람이 아니었다.
파워 오브 도그 p.95
피터 역시 섬세하고 예리한 인식의 소유자이다. 피터는 필의 동생 조지와 결혼한 로즈의 아들이다. 친부는 자살했고, 그에 대한 비밀은 오직 피터만이 간직하고 있다. 섬세한 피터는 어머니의 재혼으로 인해 가족의 역학이 변하는 것을 무섭도록 직감적으로 알아차린다. 더불어 필이 자신의 어머니를 싫어하고, 어머니가 그 때문에 힘들어 한다는 것까지.
여기서 눈여겨 봐야 할 부분은 피터의 목적은 자신의 어머니 로즈를 지키는 것이라는 점이다. (영화에서는 첫 내레이션으로 이를 드러낸 후 전개한다.)
The Power of the Dog(2021).
작중 서술되었듯 필과 피터는 모두 남들과는 다른 예리한 시선의 소유자이며, 이는 이 두 사람이 모두 산에서 "개" 를 볼 수 있다는 것으로 표현된다.
... "저쪽을 한번 봐. 저기. 뭐 보이는 거 있나?" 필이 어깨를 으쓱했다. "네 눈에야 언덕 비탈밖에 안 보이겠지. 하지만 브롱코 헨리는, 그 사람이 저 언덕을 볼 땐 말이야, 네 생각에는 그 사람이 뭘 봤을 것 같아?"
"개요. 달려가는 개를 봤을 것 같아요."
필은 멍하니 피터를 바라보며,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이런, 젠장. 너 그걸 지금 바로 알아본 거야?"
"목장에 처음 왔을 때 봤어요."
The Power of the Dog, p.342-343
둘 모두 남다른 시선을 가졌고 타인과 다르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이후의 아이러니를 이끌어 내는 결정적인 차별점이 있다.
필은 위협할 때 이빨을 드러내는 것처럼 늘 공격적인 태도로 일관하나, 그 심연에는 뒤틀린 그리움이 자리하고 있다.
(347페이지에서 "그가 오래 전 단 한번 느꼈을 뿐 다시 느낄 날이 오리라고는 바라지도 원하지도 않았던 것이었다. 잃어버리면 마음이 산산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었기에." 라는 구절로 알 수 있다)
피터는 겉모습은 토끼처럼 유약할지라도 그 심연에는 친부의 사체를 보고도 동요하지 않고, 해부를 아무렇지 않게 해내는 오싹한 냉정함이 있다.
따라서 피터는 필의 태도 변화를 지켜보면서, 매우 담담한 태도로 자신의 "구원"을 실현하기 위한 치밀한 판을 얼마든지 짤 수 있는 인물이었다.
2. 성경의 상징
작품 제목인 "The power of the dog"는 시편의 구절에서 따왔다.
Deliver my soul from the sword; my darling from the power of the dog.
Psalm 22:20
시편은 그 어원을 고려할 때 신에 대한 찬미가이며, 여러 저자가 있다고 본다. 해당 구절은 다윗의 노래라고 해석하며 시련에서 자신을 구해달라고 청하는 노래이다.
피터는 이 성경 구절로 그의 행위를 구원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계획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하느님이 미소를 띄며 내려다보는 기분을 느끼며"(321p) 작업에 착수했으며, 이후 "이제 로즈는 구원받았으므로" (363p) 라고 혼자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초반에 피터가 어머니에게 주고 싶은 여러가지 요소들을 잡지에서 오려 스크랩북을 만드는 장면이 있다. 그리고 작품의 후반부, 그는 자신이 인상깊게 읽은 성경 구절로 스크랩북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싶어한다. 자력구원을 하고 성경에서 감동 받는 아이러니라니.
더불어 영화의 연출자인 제인 캄피온 감독은 npr과의 인터뷰에서 이 작품에서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와 비슷한 이미지라고 느껴졌다는 코멘트를 남긴 바 있다.
이 작품은 사전정보가 없든 있든 책장이 쉴새없이 넘어간다. 더불어 전지적 작가 시점임에도 필을 묘사할때는 모순적인 감정까지 과할 정도로 속속들이 적어내면서 피터를 묘사할때는 철저히 행동과 관찰 위주로 서술을 이끄는 방식은 정말.. 탁월하다.
억눌린 정체성이 삐뚤어진 방식으로 표출되고, 마침내 조용하게 폭발하는 광기.
최근 읽은 책 중 인간의 심연과 모순적인 심리 묘사에 집중해서 정말 흥미롭게 읽었다. 끝맺을 말을 한참 고민하다가, 이 책을 3월의 구독서로 추천한 이동진 평론가의 문장을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주인공의 행동에 동의할 수 없고 그 뒤틀린 심리에 고개를 끄덕일 수 없는데도 왜 그런 사람의 이야기를 읽으며 독자들이 깊은 감동을 받기도 하는 걸까요. 그건 결국 문학이 인간이라는 수수께끼와 세계라는 미스터리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시간의 짙은 안개 속에서 헤매는 우리는 모순과 역설을 통해서만 스스로에 대해 간신히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2022년 3월, 이달의 큐레이터 이동진 레터
+) 제이크 질렌할과 히스 레저 주연의 "브로크백 마운틴"이라는 영화가 함께 떠올랐다. 내용은 완전히 다르지만 왠지 다시 보고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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